서울대학교 유교의식 2

2016. 4. 21. 23:11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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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사의 절차



제사의 절차는 크게 12단계로 구분된다. 각각의 단계를 독축(讀祝), 아헌(亞獻), 종헌(終獻), 첨작(添酌), 삽시정저(揷匙正箸), 합문(闔門), 계문(啓門), 헌다(獻茶), 철시복반(撤匙復飯), 사신(辭神), 철상(撤床), 음복(飮福)이라고 부른다. 독축은 초헌이 끝나고, 모두가 무릎을 꿇고, 축관이 축문을 읽는 것이다. 축문을 다 읽은 후 모두 곡을 하거나 두 번 절을 한다. 아헌은 두 번째로 술잔을 바친다는 뜻으로 내자가 술잔을 올린다. 그 후 네 번 절을 한다. 종헌은 마지막 세 번째로 술잔을 바치는 의식이며 아헌자 다음의 근친자가 술잔을 올리는 것이다. 첨작에서 종헌이 끝나고 제주가 신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집사가 다시 술잔을 채운다. 삽시정저에서 첨작이 끝난 후 아내가 메 그릇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메 그릇 가운데에 꽂는다. 삽시정저가 끝나고 제주는 두 번, 주부는 네 번 절을 한다. 




합문은 모두 밖으로 나가 문을 닫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 후 닫았던 문을 다시 여는 것이 계문이다. 축관이 기침을 세 번하고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들어간다. 헌다는 갱을 내리고 숭늉을 올린 뒤 메 세 술을 떠서 물에 말아놓고 저를 고르는 행위이다. 이때 참사 자들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묵념하다가 고개를 든다. 철시복반에서 숭늉 그릇에 놓인 수저를 거두어 제자리에 놓고 메 그릇의 뚜껑을 덮는다. 사신은 고인의 영혼을 전송하는 절차로 참사 자가 신위 앞에 일제히 두 번 절한 뒤, 지방과 축문을 불사른다. 여기까지하면 보통 제사행위가 끝났다고 본다. 그리고 철상은 제상위의 모든 제수를 차례로 물리는 것이고, 음복은 참사 자들이 제수를 나누어 먹는 행위이다. 





5. 본인의 감상1-새로 배운 것


개신교, 천주교, 불교, 심지어 이슬람교와 힌두교까지, 우리나라에 수많은 종교들이 유입되었다. 고대부터 유입되어온 불교는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었고, 최근에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우리 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유교는 한국인들의 삶과 가치관의 밑바닥에 큰 틀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가장 그 부분이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이 바로 이 제례에 관한 것이다.



본인은 일 년에 수차례의 제사의식을 행하면서 이런 방식은 유구한 시간동안 흘러내려온 우리나라의 전통인줄 착각하였다. 하지만 여러 참고문헌들을 연구하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현재의 제례는 18세기 이후에 갖춰진 것으로 500년도 채 되지 않은 전통이었던 것이다. 본문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가부장적 질서가 형성되기 전, 즉 18세기 전까지는 여러 형제자매들은 차등 없이 재산을 균분상속을 받았다. 또한 실록의 다양한 사례를 살펴보면 제사를 지낼 때에도 장자가 주도하는 경우는 손에 꼽았고, 대부분의 경우 나이나 성별 구분 없이 돌아가며 제주를 맡았다. 



또한 현대에 들어와 화장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나는 이것이 전통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통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논문을 읽으면서, 우리 민족의 진실한 전통 제례 문화는 매장이 아니라 화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삼국시대의 무덤들 중 몇몇 왕족의 고분을 제외한 다른 일반 백성들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가 예전부터 궁금했었는데, 그 고민 역시 이번 연구로 해결되었다.



그리고 필자가 지금까지 행하였던 제사의식은 대부분이 생략된 것이라는 점도 느꼈다. 필자의 가정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절차들 중에서 초헌, 독축, 종헌, 삽시정저, 합문, 계문, 사신, 음복까지만 한다. 이것만 해도, 유교의 제례의식에 관해서 무지했던 필자에게는 충분히 복잡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간소화된 제사의식이며, 사실 제례는 의식 전의 준비, 제례의 절차, 의식 후 예절로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필자가 행하여 왔던 것은 제례절차와 의식이 끝난 후 예절에 국한되어있었던 것이다.




6. 본인의 감상2-생각한 것



제례에 대한 이 보고서를 쓰면서 유교에 대해서 고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보통 우리가 유교는 교(敎)가 아니라 학(學)이라고 한다. 교는 어떠한 절대적인 타자를 믿거나 사후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반해, 공자나 맹자 주자 등 유교의 성인들은 절대적인 타자를 가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사후세계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유교는 잘못된 표현이고 유학이라는 표현이 옳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혹자는 위에서 말한 제례를 내세우며, 유교는 분명히 사후세계를 말했기 때문에 유교가 맞는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유교는 분명 종교라기보다는 학문에 가깝다. 유교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논어』에는 ‘자불어 괴력난신(子不語 怪力亂神)’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것을 풀이하면 공자는 괴이하거나 패도적인 것, 어려운 것이나, 귀신 따위 등을 이야기 하지 않았고, 지극히 일상적인, 그러면서도 누가 들어도 합당한 이야기를 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유교를 종교로 보는 것은 그것의 근본과 위배되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제례는 무엇인가. 분명 공자도 3년상을 지지하며 제례에 성실히 임할 것을 강조하였다. 본인은 제례를 공자의 핵심사상인 효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였다. 제례는 귀신에 대한 제사라기보다는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자식의 애틋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의 발현인 것이다. 논어에서도 공자는 3년상을 지지하는 근거로 신(神)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어린 시절 부모께서 자신을 품어주셨던 기간이 3년이라는 것과 부모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희석시키는데 걸리는 기간이 3년이기 때문에 자식으로서 마땅히 3년상을 지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 마음의 진실함과 제례의 형식이 어우러져 부모님께 효를 다했을 때, 능히 공자의 이상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님에 대해 효를 다한 사람치고 윗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자는 없을 것이며, 윗사람과 아랫사람간의 관계가 화목해지면 자연히 덕이 넘치는 사회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현대의 서구적인 사회와 과거의 제례문화는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제례가 과거 성인이 생각하는 이상사회의 시발점 이었다는 관점에서 제례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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